[고종의 후궁과 주변의 상궁들]
1) 광화당 이씨(光華堂 李氏 1887-1970)
고종의 후궁. 본명은 이완흥(李完興). 유복(裕福)한 중인계급의 집안에 태어나서 고모(姑母)의 소개로 나이 13세 때에 경복궁 지밀(至密)의 세수간(洗手間) 나인(內人)으로 입궁하여, 고종에게 승은(承恩)을 입었습니다. 왕자 '육(堉)'을 낳고 귀인(貴人)이 되었는데, 왕자가 2살로 요절(夭折)하였습니다.
워낙 인물이 훤하고 키가 헌칠하게 컸으며 도량이 넓어서 같은 처소 후배인 삼축당 김씨(三祝堂) 김씨가 훗날 왕으로부터 승은을 입어 사랑을 독점하였으나 그 분과 형제와 같이 친했습니다. 고종께서 승하하신 후 덕수궁에서 나와 나라에서 지어준 사간동(司諫洞) 집에서 아래윗집 울타리를 트고 50여 년을 친형제와 같이 살다가 돌아갔는데 뒤에 금곡능(金谷陵) 경내(境內)의 발치에 아래위로 나란히 묻혔습니다.
2) 삼축당 김씨(삼축당 김씨 1890-1972)
고종의 후궁. 본명은 김옥기(金玉基). 아버지의 외도가 심하여 가정에 등한하였으므로 그 어머니가 고생하는 것을 보고 홀로 독신이 될 각오로 지낼 것을 결심하고 있던 차에 친척의 연줄로 나이 13세 때에 경복궁 세수간 나인으로 입궁해서 고종의 사랑을 받아 승은 차, 가장 연소(年少)한 후궁으로서의 고종의 총애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후사(後嗣)를 얻지 못하였으므로 특별상궁(特別尙宮)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순종이 즉위하여 순종으로부터 부왕(父王)에 대한 효도의 연장으로 '삼축당'이란 당호(堂號)를 받고 금반지까지 하사 받았습니다.
날씬한 몸매에 살갗이 깨끗하여 청초(淸楚)한 인상을 풍기며 성품이 다정다감(多情多感)하고 총명하여 평소 그의 문전에는 왕실 관계의 방문객들이 끊이질 않았다고 합니다.
3) 조하서 상궁(趙霞棲 尙宮 1880-1965)
3세 때 부모를 잃고 헌종비(憲宗妃) 명헌왕후(明憲王后) 홍씨 전(殿)의 제조상궁(提調尙宮)으로 있던 고모의 소개로 4세 때 경복궁으로 입궁해서 대비전(大妃殿) 지밀(至密)에서 애기 나인으로 있다가 머리가 총명하여 궁에서 특별 배려로 나인의 신분으로서 숙명여학교(淑明女學校)를 다녔습니다. 숙명의 제2회 졸업생입니다.
후일 이우(李 )공 결혼을 계기로 일본에 건너가 3년 후에 돌아와 이후 운현궁(雲峴宮)에 머물면서 지났습니다. 1965년 4월 조카딸의 집에서 돌아갔습니다.
4) 유경운 상궁(劉景雲 尙宮 1893-1971)
창덕궁의 지밀상궁으로 있었습니다.
속칭 '곰배대감'댁인 철종 형님의 댁에서 누동궁(樓洞宮) 나인으로 있다가 당시 세도가 윤덕영(尹德榮)의 소개로 창덕궁으로 옮겨와 순종을 모셨습니다. 6. 25 사변시 순정효황후 윤비를 모시고 피난처에서 고생하다가 서울 수복 후 정른 백모(白某)씨의 별장살이를 거쳐 4. 19 이후 낙선재(樂善齋)로 돌아와 살다가 병이 깊어지자 그곳을 나와 박충식(朴忠植)씨-당시 국회의원-의 호의로 자하문(紫霞門) 밖 그의 별장 한 모퉁이에서 쓸쓸한 여생을 보냈습니다.
5) 박덕임 나인(朴德任 內人 1893- ?)
덕수궁 시절에 지밀 나인으로 있었습니다.
광화당, 삼축당 등과 생각시 시절부터 교분(交分)이 두터웠습니다.
고종의 승하 후 궁을 나와 나이 29세 때 고종의 시종(侍從)이었던 서병업(徐秉업業)씨의 측실(側室)로 들어가 살았는데 자녀를 얻지는 못하였습니다. 전실(前室) 부인의 아들의 효도로 비교적 유복하게 살앗습니다. 삼축당은 말년까지 그를 찾아와 정답게 지나곤 하였습니다.
키는 보통인데 몸이 가늘은 편이고 성격이 얌전하고 상냥하면서 워낙 말수가 적었습니다.
1970년 무렵까지 성동구 장안동에서 살고 계셨다고 합니다.
6) 윤백영 여사(尹伯榮 女史 1891- 1982)
순조(純祖)의 3녀 덕온공주(德溫公主)의 영손녀(令孫女). 기억력이 좋고 박식(博識)하여 나이 80세 까지도 창경궁의 장서각(藏書閣)에 소장된 고서(古書)를 열람하러 다닌 경력이 풍부하엿습니다. 아버지는 구한말에 청빈한 관료였던 윤용구(尹容求)씨였습니다. 윤백영 여사를 궁중에서는 '저동궁(苧洞宮) 할머니'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옛날 윤여사의 친정인 공주궁(公主宮)의 이름이었습니다. 저동궁은 후일 이완용(李完用)에게 몰수를 당했다고 합니다.
7) 김명길 상궁(金命吉 尙宮 1894- 1983)
13세 때에 황태자비를 모시고 입궁하였습니다. 이러한 나인을 '본방 나인(本房內人)'이라고 합니다. 그 당시엔 2명 밖엔 없었죠.
주종관계(主從關係)라고는 하지만 60년 고락을 같이 한 지기(知己)이자 영어, 일본어를 같이 공부한 학우(學友)이기도 하였습니다. 도량이 넓고 체모(體貌)도 알고 머리 두뇌도 좋아 옛날 원로 상궁들 같은 풍격(風格)이 있었으며 , 윤비(尹妃)의 3년 상(喪)후 서쪽 궁장(宮墻) 밖 원서동(苑西洞) 작으마한 고옥(古屋)에서 3세 아래 매씨(妹氏)와 외롭게 살다가 돌아갓습니다. 아버지는 구한말 평의회(評議會: 명월관-明月館- 자리)에 다니던 관리(官吏)였으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였습니다.
입궁한 계기는 외사촌 언니가 윤비의 조모(祖母)와 친분이 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이 분께서 어릴 때 당사주(唐四柱)를 보았더니 머리에 '의숭아꽃'을 달고 있어 어차피 평범치 않을 팔자를 예측하고 궁인이 아니면 여승(女僧)이 좋겠다고 하여 자신이 아버지 몰래 결정을 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8) 박창복 상궁(朴昌福 尙宮 1906-1981)
김명길 상궁과 함께 윤비를 모셨던 낙선재시절의 상궁이었습니다.
처음엔 창덕궁 세답방 나인(洗踏房 內人)으로 들어왓다가 도중에 본방나인 정씨(鄭氏)의 후임으로 지밀로 옮겨왔습니다. 그때 지밀 노상궁들이 네 번이나 와서 선을 보고 혈통(血統)을 조사하는 등 까다로운 조건을 뚫고 당시 100 여명의 젊은 궁녀들 중에서 발탁(拔擢)된 바도 있습니다.
9) 성옥염 상궁(成玉艶 尙宮)낙선재 궁인 가운데 끝까지 남았었던 세 사람의 상궁 중에서 가장 젊었습니다. 학력은 고작 보통학교(초등학교) 수준이었지만 성격이 차분하고 손끝이 야물어 15세 때에 창덕궁의 침방(針房) 나인으로 들어와 해방되던 그 직후까지 있었다가 안동별궁(安洞別宮)의 폐지에 따라 본궁(本宮)으로 들어와 있섰습니다. 그러나 6. 25 사변 때 윤비를 모시고 피난살이와 정릉의 백씨 별장의 우거(寓居)살이를 거쳐 낙선재로 돌아와 결국 윤비의 3년상까지 치르고 나와 보문사(普門寺)에 소속된 '신자' 아파트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다고 합니다.
1) 광화당 이씨(光華堂 李氏 1887-1970)
고종의 후궁. 본명은 이완흥(李完興). 유복(裕福)한 중인계급의 집안에 태어나서 고모(姑母)의 소개로 나이 13세 때에 경복궁 지밀(至密)의 세수간(洗手間) 나인(內人)으로 입궁하여, 고종에게 승은(承恩)을 입었습니다. 왕자 '육(堉)'을 낳고 귀인(貴人)이 되었는데, 왕자가 2살로 요절(夭折)하였습니다.
워낙 인물이 훤하고 키가 헌칠하게 컸으며 도량이 넓어서 같은 처소 후배인 삼축당 김씨(三祝堂) 김씨가 훗날 왕으로부터 승은을 입어 사랑을 독점하였으나 그 분과 형제와 같이 친했습니다. 고종께서 승하하신 후 덕수궁에서 나와 나라에서 지어준 사간동(司諫洞) 집에서 아래윗집 울타리를 트고 50여 년을 친형제와 같이 살다가 돌아갔는데 뒤에 금곡능(金谷陵) 경내(境內)의 발치에 아래위로 나란히 묻혔습니다.
2) 삼축당 김씨(삼축당 김씨 1890-1972)
고종의 후궁. 본명은 김옥기(金玉基). 아버지의 외도가 심하여 가정에 등한하였으므로 그 어머니가 고생하는 것을 보고 홀로 독신이 될 각오로 지낼 것을 결심하고 있던 차에 친척의 연줄로 나이 13세 때에 경복궁 세수간 나인으로 입궁해서 고종의 사랑을 받아 승은 차, 가장 연소(年少)한 후궁으로서의 고종의 총애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후사(後嗣)를 얻지 못하였으므로 특별상궁(特別尙宮)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순종이 즉위하여 순종으로부터 부왕(父王)에 대한 효도의 연장으로 '삼축당'이란 당호(堂號)를 받고 금반지까지 하사 받았습니다.
날씬한 몸매에 살갗이 깨끗하여 청초(淸楚)한 인상을 풍기며 성품이 다정다감(多情多感)하고 총명하여 평소 그의 문전에는 왕실 관계의 방문객들이 끊이질 않았다고 합니다.
3) 조하서 상궁(趙霞棲 尙宮 1880-1965)
3세 때 부모를 잃고 헌종비(憲宗妃) 명헌왕후(明憲王后) 홍씨 전(殿)의 제조상궁(提調尙宮)으로 있던 고모의 소개로 4세 때 경복궁으로 입궁해서 대비전(大妃殿) 지밀(至密)에서 애기 나인으로 있다가 머리가 총명하여 궁에서 특별 배려로 나인의 신분으로서 숙명여학교(淑明女學校)를 다녔습니다. 숙명의 제2회 졸업생입니다.
후일 이우(李 )공 결혼을 계기로 일본에 건너가 3년 후에 돌아와 이후 운현궁(雲峴宮)에 머물면서 지났습니다. 1965년 4월 조카딸의 집에서 돌아갔습니다.
4) 유경운 상궁(劉景雲 尙宮 1893-1971)
창덕궁의 지밀상궁으로 있었습니다.
속칭 '곰배대감'댁인 철종 형님의 댁에서 누동궁(樓洞宮) 나인으로 있다가 당시 세도가 윤덕영(尹德榮)의 소개로 창덕궁으로 옮겨와 순종을 모셨습니다. 6. 25 사변시 순정효황후 윤비를 모시고 피난처에서 고생하다가 서울 수복 후 정른 백모(白某)씨의 별장살이를 거쳐 4. 19 이후 낙선재(樂善齋)로 돌아와 살다가 병이 깊어지자 그곳을 나와 박충식(朴忠植)씨-당시 국회의원-의 호의로 자하문(紫霞門) 밖 그의 별장 한 모퉁이에서 쓸쓸한 여생을 보냈습니다.
5) 박덕임 나인(朴德任 內人 1893- ?)
덕수궁 시절에 지밀 나인으로 있었습니다.
광화당, 삼축당 등과 생각시 시절부터 교분(交分)이 두터웠습니다.
고종의 승하 후 궁을 나와 나이 29세 때 고종의 시종(侍從)이었던 서병업(徐秉업業)씨의 측실(側室)로 들어가 살았는데 자녀를 얻지는 못하였습니다. 전실(前室) 부인의 아들의 효도로 비교적 유복하게 살앗습니다. 삼축당은 말년까지 그를 찾아와 정답게 지나곤 하였습니다.
키는 보통인데 몸이 가늘은 편이고 성격이 얌전하고 상냥하면서 워낙 말수가 적었습니다.
1970년 무렵까지 성동구 장안동에서 살고 계셨다고 합니다.
6) 윤백영 여사(尹伯榮 女史 1891- 1982)
순조(純祖)의 3녀 덕온공주(德溫公主)의 영손녀(令孫女). 기억력이 좋고 박식(博識)하여 나이 80세 까지도 창경궁의 장서각(藏書閣)에 소장된 고서(古書)를 열람하러 다닌 경력이 풍부하엿습니다. 아버지는 구한말에 청빈한 관료였던 윤용구(尹容求)씨였습니다. 윤백영 여사를 궁중에서는 '저동궁(苧洞宮) 할머니'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옛날 윤여사의 친정인 공주궁(公主宮)의 이름이었습니다. 저동궁은 후일 이완용(李完用)에게 몰수를 당했다고 합니다.
7) 김명길 상궁(金命吉 尙宮 1894- 1983)
13세 때에 황태자비를 모시고 입궁하였습니다. 이러한 나인을 '본방 나인(本房內人)'이라고 합니다. 그 당시엔 2명 밖엔 없었죠.
주종관계(主從關係)라고는 하지만 60년 고락을 같이 한 지기(知己)이자 영어, 일본어를 같이 공부한 학우(學友)이기도 하였습니다. 도량이 넓고 체모(體貌)도 알고 머리 두뇌도 좋아 옛날 원로 상궁들 같은 풍격(風格)이 있었으며 , 윤비(尹妃)의 3년 상(喪)후 서쪽 궁장(宮墻) 밖 원서동(苑西洞) 작으마한 고옥(古屋)에서 3세 아래 매씨(妹氏)와 외롭게 살다가 돌아갓습니다. 아버지는 구한말 평의회(評議會: 명월관-明月館- 자리)에 다니던 관리(官吏)였으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였습니다.
입궁한 계기는 외사촌 언니가 윤비의 조모(祖母)와 친분이 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이 분께서 어릴 때 당사주(唐四柱)를 보았더니 머리에 '의숭아꽃'을 달고 있어 어차피 평범치 않을 팔자를 예측하고 궁인이 아니면 여승(女僧)이 좋겠다고 하여 자신이 아버지 몰래 결정을 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8) 박창복 상궁(朴昌福 尙宮 1906-1981)
김명길 상궁과 함께 윤비를 모셨던 낙선재시절의 상궁이었습니다.
처음엔 창덕궁 세답방 나인(洗踏房 內人)으로 들어왓다가 도중에 본방나인 정씨(鄭氏)의 후임으로 지밀로 옮겨왔습니다. 그때 지밀 노상궁들이 네 번이나 와서 선을 보고 혈통(血統)을 조사하는 등 까다로운 조건을 뚫고 당시 100 여명의 젊은 궁녀들 중에서 발탁(拔擢)된 바도 있습니다.
9) 성옥염 상궁(成玉艶 尙宮)낙선재 궁인 가운데 끝까지 남았었던 세 사람의 상궁 중에서 가장 젊었습니다. 학력은 고작 보통학교(초등학교) 수준이었지만 성격이 차분하고 손끝이 야물어 15세 때에 창덕궁의 침방(針房) 나인으로 들어와 해방되던 그 직후까지 있었다가 안동별궁(安洞別宮)의 폐지에 따라 본궁(本宮)으로 들어와 있섰습니다. 그러나 6. 25 사변 때 윤비를 모시고 피난살이와 정릉의 백씨 별장의 우거(寓居)살이를 거쳐 낙선재로 돌아와 결국 윤비의 3년상까지 치르고 나와 보문사(普門寺)에 소속된 '신자' 아파트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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